이종찬(비평가)

지하철 역사(驛舍) 안은 장소라기보다는 통과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그저 거쳐가야만 하는 장소 아닌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사람들은 지하철 역사를 구체적인 장소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 비(非)장소에 작은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역사 안에 위치한 ‘메트로 미술관’이 그곳이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라지며 시선은 여간해선 자신의 주변 바깥 쪽을 향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개인과 개인들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사람들의 종종걸음 사이로 뜻밖의 전자음이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스크린 속 비정형의 홀로그램 이미지가 화면 속을 유영하며 떠다니고 있다. 센서에 포착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통행자들 각각의 움직임과 연동되어 2차원 스크린 위에서 서로 만나거나 흩어진다. 그러나 실제의 3차원 공간에서 그들은 만났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생면부지의 타인들이다. 그리고 처음에 나의 시선을 끌었던 정체불명의 소리 역시 사람들의 움직임에 동기화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화이트 큐브는 없다. 흡사 시간이 멈춘 듯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 안에서 예외적 탁월성을 갖춘 천재적 작가의 작품을 거리를 두고 관조하곤 했던 식의 감상법과는 거리가 멀다. 프로젝트 로우키의 <닿을 때 만나는 것들>은 그보다는 차라리 게임의 방식을 닮아 있다. 예술 감상자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오롯이 자신의 예술적 아우라를 뽐내던 모더니즘 예술 작품의 존재론과 달리 <닿을 때>는 수용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에 의해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예술사학자 할 포스터는 현대 예술의 이와 같은 경향을 두고 “언제부터인가 미술관은 점점 더 테마파크가 되어 가고 있다.”며 비관적으로 논평한 적이 있지만, 새로운 경향이 이전에 비해 ‘예술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도, 존재를 인식할 일도 없었을 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잠시 동안 마주쳤다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이내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지금 “그들은 만났다기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만남’이 아니다. ‘마주침’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닿을 때>는 바로 이 찰나의 순간 명멸하는 공동체에 주목한 듯 보인다. 만남이 아니라, 마주침(encounter)의 공동체.

얼마 전 만났던 친구가 메트로 미술관에서 본 전시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닿을 때>는 아니었다. 친구는 역사 안 벤치에 앉아 전시 풍경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때 옆 벤치에서 노인과 젊은 여성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아마도 전시를 보러 앉아 있는 여성에게 노인이 다가와 음식을 먹어야 하니 비켜달라고 한 모양. 여성이 거부하자 둘 사이에 언쟁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인의 꼰대력도, 젊은 여성의 무례함도 아니다. 전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지만 아마도 정황상 그동안 이 장소를 자주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노인과, 평소 이 장소에 올 일이 없었겠지만 전시 때문에 이곳에 들른 여인 사이에 발생한 우발적 충돌. 나의 친구는 이 모든 과정이 전시의 한 부분과도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저만치서 들려오는 구세군 종소리와 지하철 역사의 백색 소음 속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 왔다고 한다. 친구가 들었던 저 구세군 종소리는 어쩌면 내가 <닿을 때>에서 마주했던 사운드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같은 장소, 그러나 다른 시간대의 저 두 소리들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나는 서울 상월곡동의 작은 동네에서 지역의 예술가 동료들과 함께 ‘쌀집’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예술공간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하필이면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나는 그곳 쌀집의 통창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곳을 떠나 고향 춘천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는데 여전히 가끔 그 통창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통창 밖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던 듯하다. 통창 밖 마을 골목길에는 거창한 예술 따위는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 무시로 오갔다. 대부분은 노인 분들이었는데 거주 년수로 따지자면 거개가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와 같은 전문적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들의 거주 년수 짬밥은 비할 데가 못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주인은 누구일까.

프로젝트 로우키의 <닿을 때>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술적 실험으로 읽힌다. 남녀노소, 내외국인, 장애 여부 등 각각의 개별성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수용 감각에 대한 실험. 그 과정에서 ‘만남’이 아니라 ‘마주침’에 주목한 <닿을 때>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만남이 동일자들의 (안으로 닫힌) 공동체에 국한된다면, 마주침은 (바깥으로 열린) 타자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는 만남보다는 마주침의 공동체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